티스토리 뷰

에밀 뒤르켐은 자살을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개인과의 상호작용의 결과임을 자살론을 통해 밝히고 있다. 자살론에는 여러 유형의 자살이 나오지만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신교와 구교 집단의 자살률에 대한 것이다.

뒤르켐의 연구에 의하면 비슷한 지역, 그리고 같은 민족인 신교와 구교 집단을 비교하였을 때 구교의 자살률이 낮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를 전통적 규범과 개인주의적 성향이라는 이유로 풀어내었다. 즉 신교는 교회의 영향력이 비교적 적고, 구교는 교회의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적 영향이 자살을 줄인다는 해석이었다.

대학을 다닐 때 사회조사분석이라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수업의 첫 시간에 교수님께서 사회과학에 있어 뒤르켐의 명암에 대한 얘기를 하신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던 자살이라는 현상을 통계를 이용하여 사회학을 과학의 반열로 올려 놓은 것이 뒤르켐의 업적이지만 그 해석에 있어 오류를 범한 것이 뒤르켐의 그림자라는 것이었다.

그 수업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의 자살률이 적은 것은 교회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가톨릭 신자들의 공동체가 더 끈끈했기 때문이고 이것은 결국 자살의 가능성을 줄였기 때문이었다는 새로운 해석이 소개되었다. 이것은 독신인 사람의 경우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더욱 타당한 해석일 수 있다는 부연도 뒤따랐다.

기억의 창고에서 이 뒤르켐을 다시 끄집어 낸 것은 마이후에 와서 처음 들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대표이신 @mywho88 님은 소셜 네트워크의 가능성을 설명하면서 가볍게 뒤르켐을 거론했고 연이어 떠오른 인물은 바로 2007년 버지니아 총격 사건의 주범인 조승희였다.

국제 사회를 경악으로 몰고 갔던 만큼 조승희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조승희라는 사람은 누구이며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에 초점을 맞춰 여러 사람들이 분석을 거듭했다. 그 결과 이 사건의 원인을 조승희라는 개인에서 찾기 보다는 사회 속에서 소외 당한 한 사람의 분노로 결론을 짓는 듯 했다.

이 같은 분석은 조승희가 총격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 여러 차례 경고를 했던 것과 또한 사건 직전 존박이 출연해서 더 잘 알려진 아메리칸 아이돌이라는 프로그램에 참가 신청을 했던 것을 그 증거로 삼았다. 그의 경고는 결국 자신을 도와달라는, 자신과 얘기해 달라는 그런 요청이었고 아메리칸 아이돌의 참가는 사회 속에서 자신을 바라봐 주기 바라는 그의 소망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는 끝내 그의 요청에 냉담했고 결국 이 소외감은 큰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자살론에서 파생된 새로운 시각은 공동체, 즉 사람들간의 상호작용이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가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끼리 의견을 교환하는 소통의 장이 공동체라는 것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뒤르켐이 자살을 연구하던 그 때에 비해 지금은 더욱 더 개인화되고 공동체가 파편화되고 있다. 역시 이전에 비해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조승희도 이 중 하나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위의 그림과 같이 여러 심리학자들이 얘기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마음을 숨기고 있다가 일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려움을 어떤 식으로든 지속적으로 표출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람들 틈바구니 속으로 들어오려고 나름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다. 이미 다른 사람의 친목의 범위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관심을 끄는 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요즘 인간관계의 확장을 실감하고 있다. 그것은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도구들은 사람과 소통하는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비용적인측면도 상당 부분 해소해 주고 있다.

이러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경우 이미 안면이 있는 사람들끼리의 관계를 공고히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어나갈 수도 있다. 이러한 도구들로 인해 사람들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보다 넓고 느슨한 공동체에 소속되어가고 있는 것도 소셜 네트워크로 인해 생겨난 현상이다.

만약 조승희가 문턱이 높은 아메리칸 아이돌이 아니라 트위터를 시작해 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소셜 네트워크가 인간 관계나 개인의 심리 상태에 대해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리고 조승희라고 하는 복잡한 한 개인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반화하려는 의도는 더더욱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극단적인 일탈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사람들과의 소통이 그만큼 절실하고 이 절실함이 절망이나 분노로 바뀌는 순간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 속으로 좀 더 쉽게 뛰어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사람 중 일부는 이러한 절실함이 해소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셜 네트워크는 비교적 쉽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러한 절실함이 소셜 네트워크로 어느 정도만 충족 된다면 그들은 극단적인 방향으로의 이행을 어느 정도 막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인해 모든 자살과 이러한 식의 일탈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를 통해 단 한 명이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이로 인해 생명을 잃거나 고통 받는 사람들은 그만큼 줄어들 것으로 생각될 뿐이다.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도 중립적이다. 이 말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사회에 순기능으로도 역기능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강력한 힘이 있음을 우리는 실감한다. 그렇다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하는 우리가 보다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보듬기 위해 조금씩만 더 신경을 쓴다면, 어쩌면 우리는 정말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고
댓글
  • 프로필사진 simboyz 글에 다시 예전처럼 좋아지셨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ㅎㅎ 2010.12.09 12:2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performeister.tistory.com BlogIcon novathinker 고마와 심보이..^^ 2010.12.09 12:47 신고
  • 프로필사진 simboyz 덧, 새로운 형태의 가식의 탄생일수도 있는 소셜네트워크라는 점이 내내 마음에 걸립니다. 전.
    문화적 특성과 관련된건데 우리 문화는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너무 불편하잖아요. 저도 소셜을 적극 사용하긴 하지만, 때로는 가식으로 포장하거나 은유로 표현할 때도 많아요.
    2010.12.09 21:13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aikoo.net BlogIcon 사시미 SNS 서비스가 살인자 조승희의 탄생을 늦출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넓지만 여전히 '얕은' 관계 속에서 군중 속 고독을 느끼게 될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2010.12.29 10:27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performeister.tistory.com BlogIcon novathinker 그점에 있어서는 저도 공감합니다. 조만간 관계의 질과 앞으로의 소셜 서비스에 대한 글을 포스팅을 해볼 생각입니다. 2011.01.06 09:56 신고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creator1022.tistory.com BlogIcon 늦깍이낭만파 좋은 글 감사합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읽다가 소름이 돋았네요;; 2011.05.26 18:07 신고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