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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아름다운 영상을 담은 일본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바로 뒤 포스터에 나타난 송강호의 모습을 보고 이런 생각은 여지 없이 사라졌다. 포스터를 보고 이 영화는 무언가 ‘쎈 것’을 담고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설국열차라는 제목은 오히려 호기심을 강하게 잡아 끌고 있었다. 이 영화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지속되었다.

 

그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블로그를 접고 있었지만, 간만에 접하는 좋은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뭔가 보답이라도 해야겠다는 그리고 생각들이 확대 재생산 되기를 바라는 그런 생각으로 이렇게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노아의 방주, 그리고 설국열차

 

설국열차를 짧게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한 과학자들과 위정자들의 잘못된 조치로 인해 세상은 빙하기에 접어들게 되고 이 빙하기는 인간을 거의 멸망에 이르게 만든다. 그러나 ‘설국열차’ 덕분에 한 줌의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설국열차라는 새로운 세상에서 나름의 계급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고 가장 밑바닥 계급의 사람들이 현실을 타개하려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그런데 멸망하게 된 세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이라는 설정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다. 성경에 보면 인간의 타락을 보다 못한 신이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고, 신의 선택을 받은 노아라는 사람이 배를 만들어 가족들과 각종 동물을 태우고 세상이 다시 온전해 질 때 까지 생명을 이어 나간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종교를 초월하여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설국열차의 모티브는 노아의 방주에서 가져왔다는 얘기이다. 잘 알려진대로 이 영화의 원작은 프랑스 만화이고 이러한 설정도 원작의 것을 그대로 살려서 가져왔다. 원작자는 한 세대 이상이 지속되어 태어나면서 부터 부여된 계급, 지위를 가진 사회가 아니라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 창조된 사회에서 탄생한 계급, 지위 속에서 그 구성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가져온 모티브가 노아의 방주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이러한 시도는 문학작품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곤 한다. 이문열의 소설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도 초등학교에서 주인공 엄석대의 권력 부침을 통해 일시적인 공간적 시간적 배경 속에서 권력과 인간 군상을 그대로 그려냈고 “필론의 돼지”라는 소설에서도 비슷한 모티브를 가져간다.

 

 

닫힌 세계와 계급, 그리고 그 옹호자들

 

설국열차라는 배경 속에서 영화를 이끌고 가는 갈등 구조는 모든 것은 제 자리가 있다고 외치는 윌포드와 메이슨와 이를 타파하려고 하는 길리엄, 커티스 등의 맨 뒷 칸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난다. 열차뿐만 아니라 이 열차에 타고 있는 사회구조를 설계 한 윌포드와 메이슨은 열차가 멈추면 모두 죽는다고 역설하며 이를 통념화 시킨다.

 

이러한 설명은 커티스 진영이 앞 칸으로 밀고 오면서 맞닥트린 학교 칸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학교에서는 열차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통념을 실례를 통해 보여주면서 이렇게 열악한 세상에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게 해준 지배계층에 대한 찬양을 어린 아이들에게 주입시키면서 이러한 사상을 거의 종료로 승화시킨다.

 

열차의 앞 칸으로 나아갈 수록 세상이 어찌되었건 열차안에 있는 것으로 마음의 평화를 갖고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지배층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군상을 여지없이 비판한다. 한마디로 닫힌 세계 속에 사람들은 주어진 계급에 맞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채 그 속에서 편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커티스는 이렇게 불평등한 계급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봉기하게 된다. 그가 봉기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열차의 지배자인 윌포드를 대신하여 자신의 정신적 지주인 길리엄을 그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 커티스는 열차 내의 불평등한 계급문제의 원인을 지배층의 의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티스는 난관을 뚫고 열차의 맨 앞칸에서 윌포드와 만나면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을 겪게 된다. 길리엄은 윌포드와 막역한 사이이고 윌포드와 길리엄은 커티스를 윌포드의 후계자로 이미 점찍어 놓았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커티스는 경악하지만 얘기가 진행되면서 커티스는 강제 징용당한 아이들을 목격하기 전까지 윌포드에 설득되려는 지경에 이른다.

 

이는 길리엄과 커티스의 봉기가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던 한계에 기인한다. 길리엄은 가장 밑바닥에 있었고 반란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이 열차의 계급 구조를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하는 것 쯤은 개의치 않을 정도로 닫힌 세계와 계급 구조를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는 윌포드와 막역한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커티스도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바란 것은 지배층의 교체였지 계급 구조 자체를 타파하거나 하는 생각은 갖고 있지 못하였다. 이러한 한계는 바깥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지배층이 유포한 관념을맹신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그도 어렴풋이 열차 안에서만 인간은 생존할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조금 더 평등하고 나은 삶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어나는 인구, 유한한 자원을 가지고서는 어쩔 수 없다는 윌포드에 말을 수긍하여 서서히 젖어들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정한 개혁자, 남궁 민수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남궁 민수라는 캐릭터를 집어넣은 것은 봉준호 감독의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설국열차에서 윌포드와 길리엄, 커티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계급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대립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계급사회를 옹호할 수 밖에 없다는 비관적인 내용으로 끝나버렸을지 모른다.(이는 원작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생각이다. 원작에는 다르게 묘사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궁 민수라는 캐릭터를 투입하면서 이러한 갈등의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한다. 마치 전봉준을 연상시키는 남궁 민수는 설국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 중 가장 혁명적인 인물이다. 그가 혁명적인 이유는 그가 가진 생각이 다른 캐릭터와는 상대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설국열차의 종교 처럼 내려오는 “밖에 나가면 죽는다.”라는 생각을 뒤집어서 “언제쯤 밖에 나가면 살 수 있을까"라는 역발상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딸에게도 이러한 얘기를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의 생각을 차근 차근 실현한다. 그 자신이 마약중독자 처럼 보이는 것을 개의치 않고 유일하게 구할 수 있는 폭약인 크로놀(마약으로도 사용됨)을 모으게 되고 결국 열차의 문을 폭파시켜 닫힌 세계를 개방하는 것에 성공하게 된다.

 

 

열린 세상과 그 적들

 

결국 설국열차의 표면적인 갈등은 윌포드와 커티스에게서 나타나지만 그 이면의 갈등은 계급을 옹호하는 윌포드, 커티스와 남궁민수 사이에서 나타나게 된다. 윌포드는 설국열차라는 세계와 전체주의 사회를 만든 사람이고, 이 구조를 유지한 채 점진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진 커티스는 닫힌 세상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남궁민수는 자신의 지식과 관찰을 통해 이를 실현해 나가려 하는 열린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어릴 때 읽었던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떠오르게 한다. 오래되서 가물가물하지만 그 책에서는 계급사회를 닫힌 사회로 규정하고 열린사회로 이동하려면 합리성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설국열차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열린 사회가 아닌 열린 세상과 그 적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칼 포퍼의 저작에서는 닫힌 사회는 계급사회이고 계급의 변경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위한 투쟁이 벌어지지 않지만 열린 사회에서는 계층간의 이동이 가능해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특성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윌포드와 길리엄은 닫힌 사회를 옹호하는 열린 사회의 적이 되고 커티스는 앞칸으로 이동하여 윌포드의 자리를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열린 사회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열린 세상을 만드려는 남궁민수에 비하면 커티스도 열린 세상의 적이 될 수 밖에 없게 된다.

 

결국 이 영화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큰 통찰이 필요하고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는 과학적인 합리성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마디로 통찰과 관찰을 통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좀 더 크게 현실을 통찰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 사상, 철학, 관습 등의 모든 것을 의심해서 다시 따져 보는 그러한 자세를 가져야 현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 진다는 것을 감독은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간만에 많은 생각은 물론 무언가를 깨우쳐 주는 영화를 만나게 되어 기쁘고 이 영화를 그저 액션 영화정도로 감상하고 넘어가려는 사람들을 한 번쯤 더 불러세워 공감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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